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혼란한 독일과 나치의 집권 === || {{{#!wiki style="margin:-15px -10px"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Lost-territory-of-Germany.png|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Germany_Hyperinflation.png|width=100%]]}}} || ||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이 잃은 영토 || 무리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해 발생한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 || >'''독일에게 불필요한 굴욕을 주어 [[나치 독일|그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 >----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원정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1921년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처럼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초년생에게는 최악의 시기였다. 전쟁 배상금 때문에 독일의 경제성장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가 남긴 일기를 편집하고 괴벨스 전기를 서술한 독일의 작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는 독일에게 재앙과도 같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독일 제국]]이 멸망하고 탄생한 새로운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은 시작부터 숱한 수난을 겪어야 했다. 기존 독일의 영토 중 상당 부분이 뜯겨나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라는 신생 국가가 갑자기 나타나 독일의 영토를 가르고, [[알자스-로렌]]과 같은 민감한 영토 또한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 독일은 총 영토의 13% 정도인 7만 km²의 땅과 총 인구의 10분 1 정도인 650만 명을 잃었는데, 이 비율을 [[대한민국]]으로 환산하면 '''[[경상남도]], [[대구광역시]], [[인천광역시]]를 모두 합친 영토(약 13,000km²)와 510만 명의 인구를 잃은 것이 된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라인란트]]는 명백한 독일의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강제로 비무장화 되었고, 독일의 군대는 공군의 보유가 일체 금지되며, 10만 명이라는 극도로 제한된 규모만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군대가 축소되자 유능하고 선별된 장교들만이 이 구조조정에서 살아남게 되어 상당한 정예화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훗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는 많은 [[독일 국방군]] 명장들이 이 시기 유능함이 입증되어 군에서 안 쫒겨나고 살아남은 인물들이다.] 베르사유 조약은 또한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금]]을 기준으로 '''1,320억 마르크'''를 20년 안에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하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은 약 20억 달러(약 100억 마르크) 정도로 실제 배상금은 이에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배상금은 석탄과 목재와 같은 현물로도 배상이 가능했으나, 당시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던 이러한 주요 원자재들이 전쟁 배상금으로 빠져나가자 독일의 공장들은 제대로된 기능을 할 수 없었고, 독일의 경제는 어려움을 겪으며 배상금 지불 능력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결국 1922년 연말 독일은 [[디폴트]] 상태에 빠졌으며 국가 규모의 부도로 인해 전쟁 배상금의 지불이 불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과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감면해주지 않았다.[* 프랑스의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는 아예 대놓고 "독일이라는 오렌지에서 더 이상 과즙이 떨어지지 않을 때까지 쥐어 짜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독일이 부강한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경제를 압박해야 된다고 생각했으며, 같은 [[협상국]]이던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독일의 전쟁 배상금을 감면해주자는 입장이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어떻게든 독일에 군사적, 경제적 제재를 부과하고자 하였다. 프랑스는 대전 중에 발생한 높은 적자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제를 안정화 시키기 위해서 독일의 경제적 부담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은채 배상금 지급을 받아내려 했다. || {{{#!wiki style="margin:-15px -10px"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R09876%2C_Ruhrbesetzung.jpg |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De68SQLVAAAmUCW.jpg|width=100%]]}}} || || 독일 시민과 총칼을 들고 있는 프랑스군 || 시내를 활보하는 프랑스군 전차들 ||}}}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French-Soldier-German.gif|width=100%]]}}} || || 독일 시민을 폭행하는 프랑스 군인들[* [[루르 점령]] 말기 한 독일인에게 암살 당한 프랑스 중령의 관을 운구하던 중 조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만히 있던 독일인들을 구타하는 모습으로, 이런 행동은 고스란히 촬영되어서 훗날 나치 정권의 반프랑스 선전으로 사용되었다.] || 1922년 말, 독일이 배상금으로 지급할 예정이었던 석탄과 목재가 6개월 가까이 연체되자, 배상 위원회는 독일에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고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직접 받아내겠다는 명목으로 엄연한 독일의 주권 하에 있던 [[루르 공업 지대]]를 [[루르 점령|군대로 무력 점령하기에 이른다.]]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를 점령하자 현지 독일인들은 상당히 반발했고 이들은 비폭력 저항과 [[시민 불복종 운동]]을 통해 프랑스와 벨기에에게 항의 의사를 나타냈다. 헌데 이에 대한 프랑스의 대응이 전세계적인 비난을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프랑스군이 독일 민간인들을 [[사보타주]] 혐의로 처형시켜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희생된 독일인들은 2년 동안 130명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서 평시에 외국의 민간인들을 처형한 이 사건이 일파만파 알려지자, 프랑스 정부는 맹렬한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독일을 동정하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협상국이던 [[영국]]과 [[미국]]도 프랑스를 비난하기에 이른다. 프랑스의 동맹국인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과 경제적으로 연계된 점과 프랑스의 이런 행동이 독일이 [[소련]]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만들 것[* 당시 패전으로 인해 평판이 바닥으로 떨어진 독일과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부터 모두 기피받던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라는 공통점으로 [[라팔로 조약]] 등을 통해 이미 우호적인 관계를 쌓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과 인접했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심기를 매우 거슬리게 만들었다.]이라는 우려 때문에 점령에 반대했다. 이러한 국제적 외교문제와 경제적 문제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던 미국과 영국의 비난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독일의 배상금 부담을 완화시켜주는 [[도스 안]]에 찬성한 채 1925년 7월과 8월에 걸쳐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Beer Hall Putsch.jpg|width=100%]]}}} || || [[뮌헨 폭동]] 당시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차고 있는 나치당원들 || 그러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이미 독일 경제는 배상금과 점령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도스 안]]의 채택 전부터 무리한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한 외화를 사기 위해 당시 독일의 화폐였던 파피어마르크를 무식하게 찍어내었고, 이는 곧 독일에 [[초인플레이션]]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루르 점령 당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와 벨기에를 향해 총파업을 통해 대항하라고 지시한 독일 정부의 방침 또한 인플레이션을 악화시키는 데에 일조 했다. 1922년 말, 약 160 마르크였던 [[베를린]]의 빵 한 덩이는 1923년 말에 이르러선 200,000,000,000[* 2천억] 마르크가 되어 있었다. 나라는 초인플레이션에 허덕이고 공산당이 허구언 날 폭동을 일으키며, 국가 안에서는 [[배후중상설]]이 돌아 시민들 간에 불신을 만들고, 외국의 군대가 전쟁 배상금 갚으라고 강도처럼 처들어와 자국 시민들을 처형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에 많은 독일 국민들은 큰 실망과 분노를 느꼈다.[* 이 실망한 사람들 중에는 훗날 나치 인사가 되는 이들도 있었는데, 바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그 중 한 명이다.] 이 사건은 독일 정치에서 기존 중도 좌파 성향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중도 우파 성향의 [[독일 중앙당]] 양쪽에게 불신을 안겨주었으며, 우익~극우 정당의 형성을 가속화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아돌프 히틀러]]'''라는 [[뮌헨]]의 한 지역 정치인이 [[뮌헨 폭동]]을 통해 독일 전국 수준의 네임드 정치인으로 크게 부상하게 된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C87cQvdjuFc, start=60)]}}}|| || 독일 국민들에게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1933년 11월 10일 [[베를린]]에 위치한 [[지멘스]]사의 공장에서 진행된 연설.] || [[뮌헨 폭동]]에서의 실패로 체포 당한 히틀러는 1924년 2월 26일, 반역죄로 기소되어 특별 법정에 섰고 히틀러는 자진하여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 전복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서 그의 뛰어난 언변을 통해 바이마르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이러한 히틀러의 열변은 처음으로 독일 전국의 관심을 끌었고 전 세계 신문의 첫 페이지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히틀러의 재판은 24일간 이어졌으며 이 재판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국가에 대한 그의 사상과 감정을 전국에 표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재판을 담당한 주심판사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극우 민족주의 사상에 공감하는 인물이었고, 재판이 그의 정치적 텃밭이던 뮌헨에서 열린 덕에 방청객은 히틀러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가득 찼다. 결국 이러한 점들이 겹쳐 히틀러는 금고 5년형을 선고받고, 편안한 옥중 생활을 즐기며 [[나의 투쟁]]을 옥중 집필하다가 8개월이 조금 지난 뒤 [[바이에른]] 주 정부에 의해 [[가석방]] 되었다.[* 이러한 주 정부의 판단에는 당시 바이에른 주가 상대적으로 좌파 진영의 세가 강한 [[베를린]]에 맞서는 보수 진영의 중심지였던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히틀러를 계속 가둬두기엔 그를 석방하라는 바이에른 내 보수층의 압박이 상당했었다.] 석방된 히틀러는 정치 노선을 바꾼다. 기존의 폭력적 쿠데타를 통한 정권 탈취라는 [[베니토 무솔리니]]식 방법론을 버리고 선거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즉, 독일 유권자에게 투표 받아서 집권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의외로 1929년까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전국적으로 큰 힘을 쓰지 못했는데, 독일의 경제가 차츰 회복되고 서방과의 관계가 안정화되가면서 어려운 경제와 외부의 적에 맞서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라는 나치당의 캐치프레이즈가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세계대공황 미국 주가 변화와 주요국 실업률.png|width=100%]]}}}|| || {{{#000,#fff 대공황기 미국의 주가 변화와 주요 국가의 실업률.}}} || 그러던 와중, 미국발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경제 위기가 터지고 온 유럽의 경제가 아수라장이 되자 독일의 경제도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이들로 실업률이 치솟았으며, 사회 전반에 [[정치극단주의]]가 팽배해지며 다시금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한 의심과 분노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때 나치당은 혜성처럼 등장해 정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으며, 1928년 총선의 고작 2.6%에 그치던 득표율이 대공황 시기이던 1930년 총선에서는 18.3%로 수직 상승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이어진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당시 전쟁 영웅 출신의 거물 정치인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상대로 36.7%의 득표율을 얻으며, 튼튼한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뒤 이은 1932년 7월 총선에서 나치당은 37.4%로 230석으로 마침내 원내 1당으로 등극했으며, 의회 해산으로 치러진 1933년 총선에서 44%라는 득표율을 얻은 뒤 의회 내 비나치 우파와 협력해 아돌프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죽음을 알렸다. || {{{#!wiki style="margin:-15px -10px"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nazi-propaganda-02-1024x684.jpg|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Hitler portrait.jpg |width=100%]]}}} || ||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결집한 인파들 || 히틀러의 초상화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sHO2Lbfi_HM, start=20)]}}}||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부르는 나치당원들 || >'''Unsere letzte Hoffnung: HITLER''' >'''우리의 마지막 희망, 히틀러''' >---- >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포스터 문구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 이후 그의 대통령직까지 겸하게 된 히틀러는 [[퓌러]](Führer, 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모든 야당들은 철저히 탄압되었다. 이렇게 전 유럽을 전쟁의 공포로 몰아 넣을 [[나치 독일]]이 탄생했다. 독일에 대한 승전국의 무리한 징벌 의식과 대공황으로 무너져 내린 세계 경제가 그 배경이었다. 나치 독일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의 집중 육성을 통한 경기 회복을 이끌어 내었고 실업률은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1935년 [[베르사유 조약]]의 파기와 군 재무장을 선언하며 팽창주의적 외교 정책을 추구한 나치 독일은 [[루르 점령]]으로 상처 입었던 [[라인란트 재무장|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군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